전체 글44 지옥의 문을 여는 한 뼘의 인륜: 깻잎과 인슐린이 잇는 남북의 궤적(프로덕션, 휴머니즘, 남북협력) 솔직히 저는 모가디슈를 보기 전까지 '또 남북 휴머니즘 영화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2021년 여름, 종강하고 나서 정말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과 단체 채팅방에서 "우리 진짜 오랜만에 영화나 한 편 때리자"며 의기투합했던 기억이 납니다. 마스크를 쓰고 명부 작성을 하던 시절이었지만, 근처 극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팝콘도 마음대로 못 먹던 그 답답한 공기마저 친구들과 함께라 설레기만 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고 소말리아의 붉은 흙먼지가 스크린을 덮칠 때, 저희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숨을 죽였습니다.한국 영화 시스템의 완성도를 보여준 프로덕션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감탄했던 건 화려한 액션이나 배우들의 연기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정도 규모의 영화를 이렇게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자체였.. 2026. 2. 24. 닫힌 비상구와 웃는 광대: 고담의 언론이 길러낸 '슈퍼 쥐'의 반란(언론 편향, 비상구 상징, 감정 억압) 2019년 가을, 극장에서 조커를 보고 나왔을 때 객석 전체를 감싼 그 기분 나쁜 정적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보통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면 웅성거리며 일어나기 마련인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마치 관객 전체가 아서 플렉의 그 기괴한 웃음소리에 전염된 것처럼 무거운 압박감이 극장을 짓눌렀습니다. 호아킨 피닉스가 냉장고 안으로 기어들어가던 장면, 망상 속 연인 소피의 거실에 멍하니 앉아 있던 그 순간, 극장 안 모든 관객이 동시에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습니다.뉴스 브리핑이 상징하는 계급 갈등영화는 뉴스 브리핑 음성으로 시작합니다. "시내에 나가 봐요. 쓰레기와 쥐들뿐입니다. 냄새도 그렇고 쳐다보기도 역겨웠습니다." 이 뉴스가 흘러나올 때 화면을 가득 채운 건 광대 분장을 한 아서의 얼굴이었습니다... 2026. 2. 24. 궤도 위의 가짜 낙원: 엔진의 신화를 부수고 문 밖의 진실로(계급, 혁명, 패러다임) 솔직히 저는 설국열차를 처음 봤을 때 단순히 '앞으로 가는 혁명 영화'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꼬리칸 사람들이 머리칸을 향해 돌진하고, 윌포드를 쓰러뜨리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요. 그런데 다시 보니 이 영화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건 전혀 다른 곳에 있더군요. 커티스의 혁명은 사실 혁명이 아니었고, 진짜 혁명은 남궁민수가 바라보던 '옆'에 있었습니다.완벽하다던 엔진, 아이들을 갈아 넣어야 돌아가다니윌포드의 엔진은 신성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무한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스스로 발전하는 완전무결한 시스템이다. 그런데 제가 극장에서 엔진 내부 장면을 봤을 때 느낀 건 경악이 아니라 씁쓸한 웃음이었습니다. 저 '완벽한' 엔진이 고작 부품 부족 때문에 꼬리칸 아이들을 집어넣어야 겨우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이게 바로 봉준.. 2026. 2. 23. 은색 크롬으로 칠한 가짜 천국: 임모탄의 요람을 불태운 퓨리오사의 질주(워보이, 임모탄 조, 퓨리오사) 솔직히 저는 매드맥스를 처음 볼 때만 해도 "70대 감독이 30년 만에 만든 속편이 뭐 대단하겠어?"라는 생각으로 극장에 갔습니다. 그런데 2시간 내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봤습니다. CG로 떡칠한 요즘 영화들과 달리, 실제로 개조한 차량들이 사막에서 구르고 폭발하는 그 날것의 쇳가루 냄새가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왜 워보이들은 입에 은색 스프레이를 뿌릴까?"기억해줘!(Witness me!)"라고 외치며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워보이들을 보면서, 저는 이 미친 세계가 돌아가는 원동력이 결국 '비뚤어진 신념'이라는 걸 직감했습니다.워보이들이 입에 뿌리는 크롬 스프레이는 단순한 의식이 아닙니다. 이건 임모탄 조가 핵전쟁 이전에 알고 있던 여러 문화를 뒤섞어 만든 사이비 종교의 정점입니다. V8 엔.. 2026. 2. 23. 살아남는 것이 곧 승리다: 덩케르크 해변에 엎드린 우리 모두의 이야기(뺄셈의 미학, 익명의 영웅, 시간의 교차) 전쟁 영화에서 적군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면 믿어지십니까? 일반적으로 전쟁 영화라고 하면 치열한 전투 장면과 영웅적인 활약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는 그 모든 공식을 빼버린 채 오히려 전쟁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간 작품입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가장 놀랐던 건, 주인공이 잘나서 살아남는 게 아니라 단지 폭탄이 한 발 덜 떨어졌다는 '운' 하나로 생사가 갈린다는 비정한 현실이었습니다.뺄셈의 미학덩케르크는 전쟁 영화로서 없는 것 투성이입니다. 독일군은 영화 내내 거의 등장하지 않고, 주인공들의 과거 이야기도 전혀 나오지 않으며, 화려한 전투 장면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전쟁 영화는 고향에 두고 온 가족, 병든 노모, 약혼녀 같은 전사를 통해 관객의 감정 .. 2026. 2. 22. 자극보다 깊은 기록의 힘, 어둠 속에 불을 켠 스포트라이트 팀의 1년(취재의 진실, 시스템 고발, 언론의 용기) 여자친구와 함께 극장에서 를 봤을 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도 한동안 자리를 뜰 수가 없었습니다. 화면에는 성범죄가 발생한 도시 이름들이 끝없이 흘러갔고, 저희 둘 다 말없이 그 목록을 지켜봤습니다. 평소 자극적인 영화보다 깊이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여자친구가 제 손을 꼭 잡았던 순간, 이 영화가 단순한 관람을 넘어선 경험이었다는 걸 느꼈습니다.취재의 진실보스턴 글로브의 스포트라이트 팀은 네 명으로 구성된 탐사보도팀입니다. 팀장 로비를 중심으로 마이크, 사샤, 맷이 함께하는데, 이들의 특징은 취재 내용을 철저히 기밀로 유지하고 프로젝트를 직접 선정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두어 달에서 1년까지 장기 취재를 하는 이들의 독립성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영화를 보면서 제가 과거에 다큐멘터리 작업을 도왔던 경험.. 2026. 2. 22. 이전 1 2 3 4 ··· 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