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와 함께 극장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봤을 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도 한동안 자리를 뜰 수가 없었습니다. 화면에는 성범죄가 발생한 도시 이름들이 끝없이 흘러갔고, 저희 둘 다 말없이 그 목록을 지켜봤습니다. 평소 자극적인 영화보다 깊이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여자친구가 제 손을 꼭 잡았던 순간, 이 영화가 단순한 관람을 넘어선 경험이었다는 걸 느꼈습니다.

취재의 진실
보스턴 글로브의 스포트라이트 팀은 네 명으로 구성된 탐사보도팀입니다. 팀장 로비를 중심으로 마이크, 사샤, 맷이 함께하는데, 이들의 특징은 취재 내용을 철저히 기밀로 유지하고 프로젝트를 직접 선정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두어 달에서 1년까지 장기 취재를 하는 이들의 독립성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제가 과거에 다큐멘터리 작업을 도왔던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취재란 결코 화려하지 않습니다. 기록을 뒤지고, 문전박대를 당하고, 때로는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오는 날이 대부분이죠. 영화 속 기자들이 오래된 신문 기사를 일일이 찾아보고, 피해자 변호사를 찾아가 거절당하는 장면들이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게오건 사건은 한 신부가 30년간 여섯 개 교구에서 80명 이상의 아동을 성추행한 사건입니다. 더 충격적인 건 15년 전 교회 상부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봉인된 문서를 공개하려는 스포트라이트 팀의 시도는 처음부터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새로 부임한 배런 국장이 기존 취재를 중단하고 이 사건을 하라고 지시했을 때, 팀원들도 당황했을 겁니다.
제가 인상 깊었던 건 각자 역할을 나눠 동시에 움직이는 장면이었습니다. 배런은 문서 공개 청구를, 마이크는 변호사 취재를, 벤은 피의자 추적을 맡았죠. 소재를 정하고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의 그 긴장감과 설렘이 화면 너머로 전해졌습니다.
시스템 고발
피해자 변호사 게리 비디를 만난 장면은 취재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마이크가 소송 관련해서 왔다고 하자 비디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건 소송이 아니라 소송들입니다." 단수와 복수의 차이였지만, 그 한마디가 사건의 규모를 압축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내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개별 가해자 한 명의 범죄가 아니라 시스템 전체가 이를 방조하고 은폐해 왔다는 사실, 그것이 이 사건의 핵심이었습니다.
전직 신부이자 연구자인 리처드 사이프를 인터뷰하는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보스턴에 13명 정도의 가해 신부가 있을 거라는 팀의 추정에, 사이프는 신부 전체의 6%가 미성년자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통계를 제시합니다. 보스턴 신부 1,500명에 이 비율을 대입하면 약 90명이 나왔습니다. 카메라가 멈추고 팀원들이 침묵하는 그 장면에서, 저도 숨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가해자 명단을 확보하고 피해자들을 인터뷰하면서 드러난 패턴도 중요했습니다. 취약한 환경의 아이들, 특히 한부모 가정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안의 아이들이 주로 타깃이 됐습니다. 신부들은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신뢰를 쌓은 뒤 점차 성적 학대로 끌어들이는 '그루밍' 과정을 거쳤습니다.
필 사비아노와 조 크로울리 같은 피해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장면은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특히 조가 게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더 혼란스러워했고, 자신을 처음으로 인정해 준 사람이 가해자였다는 점에서 자책했다는 고백은 너무나 슬펐습니다.
언론의 용기
배런 국장의 역할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었습니다. 보스턴 출신도 아니고, 유대인이라는 외부자의 시선으로 그는 이 사건을 바라봤습니다. "개별 가해자가 아니라 시스템을 공략해야 한다"는 그의 방향 제시가 없었다면, 이 취재는 단순한 개별 사건 보도로 끝났을 겁니다.
로비가 과거에 같은 제보를 받았지만 덮어버렸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배런이 건넨 말이 가슴에 남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한 번 넘어진 사람에게 다시 일어날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진짜 용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스턴 글로브 구독자의 53%가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은 이 취재가 얼마나 큰 리스크를 감수한 것인지 보여줍니다. 사장도 이 점을 언급하며 조심하라는 뉘앙스를 풍겼지만, 배런과 스포트라이트 팀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언론의 독립성이란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요.
영화 말미에 스포트라이트 사무실로 걸려오는 수많은 전화벨 소리는 이 취재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알려줬습니다. 기사가 나간 뒤 쏟아진 제보들, 그리고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전 세계 도시 이름들은 이 문제가 보스턴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명확히 했습니다.
극장을 나서며 여자친구와 나눈 대화 중 한마디가 계속 맴돕니다. "침묵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아." 이 영화가 지루하다고 느끼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화려한 액션도, 극적인 반전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진실을 찾기 위해 묵묵히 기록을 뒤지고, 거절당해도 다시 찾아가고, 시스템과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강렬한 울림을 주는지 직접 경험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마을 전체의 일이지만, 아이를 해치는 것 또한 마을 전체의 일이다"라는 대사가 모든 걸 말해줍니다. 집단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 모두가 공범이 됩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다룬 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진실 앞에서 침묵하지 않을 용기가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