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가을, 극장에서 조커를 보고 나왔을 때 객석 전체를 감싼 그 기분 나쁜 정적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보통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면 웅성거리며 일어나기 마련인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마치 관객 전체가 아서 플렉의 그 기괴한 웃음소리에 전염된 것처럼 무거운 압박감이 극장을 짓눌렀습니다. 호아킨 피닉스가 냉장고 안으로 기어들어가던 장면, 망상 속 연인 소피의 거실에 멍하니 앉아 있던 그 순간, 극장 안 모든 관객이 동시에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습니다.

뉴스 브리핑이 상징하는 계급 갈등
영화는 뉴스 브리핑 음성으로 시작합니다. "시내에 나가 봐요. 쓰레기와 쥐들뿐입니다. 냄새도 그렇고 쳐다보기도 역겨웠습니다." 이 뉴스가 흘러나올 때 화면을 가득 채운 건 광대 분장을 한 아서의 얼굴이었습니다. 여기서 단어 몇 개만 바꿔보면 이 장면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 명확해집니다.
쓰레기와 쥐는 광대 복장의 시위대로, 고급 주택가는 토마스 웨인으로, 빈민가는 아서가 살던 쓰레기 더미 옆 동네로 치환됩니다. "시위대 때문에 사람들이 오질 않으니 망하게 생겼습니다"라는 식으로 바뀌는 겁니다. 토마스 웨인 역시 결국 아서처럼 변할 운명이었다는 걸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오프닝이었습니다. 시위대가 거리를 점령하고 폭동이 일어나면, 영화 초반 집단 린치를 당하던 아서처럼 토마스 웨인도 거리에 쓰러지게 될 거라는 암시였습니다.
영화 속 언론은 한쪽으로 노골적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부유층에 대한 반감이 퍼지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범인 편을 들었습니다.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인생에서 성취를 얻어낸 우리들 눈에는 그저 광대 무리일 뿐입니다." 토마스 웨인의 출마 선언과 이어지는 이 인터뷰들은 시위대의 입장을 대변하는 척하면서도, 결국 기득권을 홍보하기 위한 재료로만 활용됩니다. 머레이가 살해된 뒤 여러 채널에서 속보를 띄우던 장면은 광고와 뒤섞이며 소음 공해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아서와 그의 엄마 페니 플렉이 나눈 대화가 인상적입니다. "그 사람 좋은 시장이 될 것입니다. 다들 그럽니다." "다들 누구입니까? 누구랑 말해봤습니까?" 기득권만을 대변하는 언론의 말을 무지성으로 받아들이는 빈곤층의 모습은 현실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 역시 완전히 동의합니다. 제가 극장에서 이 장면을 봤을 때 소름이 돋았던 이유는, 이게 단순히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EXIT 표시가 말하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들
아서가 처음으로 살인을 저지른 뒤 우리가 가장 눈여겨봐야 할 건 비상구 표시입니다. 매 고비마다 그의 곁엔 비상구가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병원에 경찰이 찾아왔을 때, 토마스 웨인을 만나러 갈 때, 출생의 비밀을 알기 위해 병원을 찾았을 때, 지하철에서 경찰을 피해 도망칠 때. 문제는 이 출구들이 진짜 출구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경찰의 말대로 "반대쪽에서 나오는 출구들"이었습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나가는 출구가 아니라,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던 겁니다. 첫 번째 살해를 저지른 뒤 아서는 도망치지 말았어야 합니다. 이때 그냥 자수를 했거나 잡혔다면 연쇄살인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스탠딩 무대로 올라가던 장면에서도 멈췄어야 합니다. 여기서 멈췄다면 머레이 쇼에서 전국적으로 조롱당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일반적으로 EXIT 표시는 탈출구를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 영화에서만큼은 정반대입니다. 'EXIT ONLY'라는 문구가 나온 장면은 한 번뿐이지만, 각각의 상황을 따지고 보면 모두 아서가 멈췄어야 할 지점들이었습니다. 병원에서도 그냥 멈췄다면 과거로 인해 고통받는 오늘을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엄마를 자기 손으로 죽이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빛과 어둠이 반복되며 깜빡거리던 장면들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불이 깜빡거리는 건 미쳐가는 또는 미치기 일보 직전의 심리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을 죽이기 전, 사람을 죽인 후, 출생의 비밀을 알기 전. 엄마를 죽인 뒤 아서는 환한 빛에 휩싸였습니다. 드디어 미쳐버린 겁니다. 마지막 선택의 시간, 그 끝에 놓여있던 마지막 출구 표시. 최소한 여기서라도 멈췄다면 조커가 아닌 아서로 남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을 겁니다.
웃음으로 범벅된 감정 억압의 끝
아서에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가 3명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그에게 총을 건네준 렌들, 두 번째는 그가 좋아하던 코미디의 대부 머레이, 세 번째는 토마스 웨인. 이 세 명 모두에게서 아서는 버림받았습니다. 렌들은 "스스로 보호해야 돼. 넌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니까"라며 총을 건넸다가, 아서가 곤란한 상황에 놓이자 뒤통수를 쳤습니다. 머레이는 아서의 코미디를 TV 쇼에서 공개적으로 조롱했고, 토마스 웨인은 엄마의 망상으로 만들어진 친부였습니다.
엄마는 아서를 해피라고 불렀습니다. 아서는 늘 웃고 있는 광대 분장을 하며 살아갔고, 웃음을 참지 못하는 병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광대 분장을 지우기 전까지 아서는 사람들 앞에서 모든 감정을 웃음으로 때웠습니다. 아이들한테 집단 린치를 당한 후에도, 직장에서 해고당한 후에도, 그는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을 때 제가 느낀 건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불편함이었습니다. 아서가 춤을 출 때마다 반드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길거리에서 춤을 추고 난 뒤 집단 린치를 당했고, 집에서 춤을 추며 코미디를 하다 실수로 총을 쐈습니다. 살인을 저지른 뒤 홀로 춤을 췄고, 계단을 내려가며 춤을 췄고, 머레이를 죽이고 난 뒤에도 춤을 췄습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아서의 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전 아서의 춤이 고통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웃음으로 범벅된 고통스러운 코미디. 눈물과 웃음이 뒤섞여 환희와 슬픔을 모두 느낄 수 있는 그 표정이 가장 완벽한 답이라고 봅니다.
힘들 때 웃는 자가 일류라는 말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힘들 때 힘든 티를 내야 합니다. 기분 나쁠 땐 기분 나쁘다고 말해야 하고, 슬플 땐 울어야 합니다. 화가 날 때는 화도 내야겠죠. 이런 감정들을 전부 다 웃음으로 때운다면 끝내는 아서처럼 미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모든 종류의 감정들이 한순간에 터져 나오며 스스로도 제어 불가능한 상태가 될 테니까요. 웃음을 제어하지 못하던 아서처럼 말입니다. 우린 광대가 아닙니다. 속으로 울면서 겉으로 웃는다. 이보다 더한 코미디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