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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는 것이 곧 승리다: 덩케르크 해변에 엎드린 우리 모두의 이야기(뺄셈의 미학, 익명의 영웅, 시간의 교차)

by woozoo100 2026. 2. 22.

전쟁 영화에서 적군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면 믿어지십니까? 일반적으로 전쟁 영화라고 하면 치열한 전투 장면과 영웅적인 활약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는 그 모든 공식을 빼버린 채 오히려 전쟁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간 작품입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가장 놀랐던 건, 주인공이 잘나서 살아남는 게 아니라 단지 폭탄이 한 발 덜 떨어졌다는 '운' 하나로 생사가 갈린다는 비정한 현실이었습니다.

영화 덩케르크 대표 포스터

뺄셈의 미학

덩케르크는 전쟁 영화로서 없는 것 투성이입니다. 독일군은 영화 내내 거의 등장하지 않고, 주인공들의 과거 이야기도 전혀 나오지 않으며, 화려한 전투 장면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전쟁 영화는 고향에 두고 온 가족, 병든 노모, 약혼녀 같은 전사를 통해 관객의 감정 이입을 유도하는데, 이 영화는 그런 장치를 철저히 배제했습니다.

주인공 토미를 비롯한 병사들은 영화 내내 이름조차 불리지 않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는 내내 궁금했던 건, 주인공 이름이 뭔지였는데 알고 보니 엔딩 크레딧에서야 '토미'라는 이름이 공개됩니다. 반대로 그들을 구하러 가는 도슨 씨, 파리어 같은 구조자들에게는 이름이 부여되죠. 이는 구조되는 사람이 특별한 영웅이 아니라 당시 해변에 고립되었던 30만 명 중 하나임을 시사합니다.

솔직히 이 방식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전쟁 영화는 주인공을 특별하게 만들려고 애쓰는데, 놀란은 오히려 그를 익명의 존재로 남겨둠으로써 '살아남아야 할 이유는 그가 생명이기 때문'이라는 메시지를 더 강렬하게 전달합니다.

익명의 영웅

영화 속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사람은 볼튼 제독, 도슨 씨, 파리어 같은 구조자들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신문 기사에 영웅으로 기록되는 사람은 배리 키오건이 연기한 17살 소년 조지입니다. 조지는 영화 속에서 제대로 한 일이 없습니다. 그저 숭고한 마음으로 어선에 몰래 탑승했다가 우연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을 뿐이죠.

제 생각엔 이 선택이 영화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놀란은 전공을 세운 특정 인물이 아니라 이름 모르게 쓰러져 간 모든 사람이 영웅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실제로 군복을 입어본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전쟁에서 우리가 진짜 몰입하는 지점은 화려한 승리가 아니라 '저 지옥에서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본능적 공포입니다.

영화 초반 토미가 해변에 납작 엎드려 폭격을 피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폭탄이 화면 뒤쪽 깊은 곳에서부터 차례로 터지며 점점 가까워지는데, 이 'Z축의 공포'를 보면서 예전 훈련소 사격장에서 느꼈던 서늘한 긴장감이 그대로 되살아났습니다. 마지막 폭탄이 토미 바로 앞에서 터지고 그는 살아남는데, 관객 입장에서는 그다음 폭탄이 객석에 떨어질 것 같은 착각마저 듭니다.

시간의 교차

덩케르크는 세 개의 시간대가 교차합니다. 육지에서는 일주일, 바다에서는 하루, 하늘에서는 한 시간이 흐르는데, 이 서로 다른 시간을 하나의 영화로 엮어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구조라면 시간 순서대로 편집하는 게 자연스러운데, 놀란은 세 시간대를 동시에 진행시킵니다.

이 방식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명확합니다. 육지에서는 시간이 너무 느려서 문제입니다. 구원의 손길이 오지 않아 답답하죠. 반대로 하늘에서는 시간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빨리 가서 그들을 구해야 하는데 연료가 떨어지고 적기가 나타나니까요. 제 경험상 이렇게 시간의 밀도를 다르게 느끼게 만드는 연출은 정말 드뭅니다.

세 시간대가 처음 만나는 지점은 콜린스의 추락 장면입니다. 하늘에서 구조자였던 콜린스가 격추당해 바다에 떨어지고, 도슨 씨의 어선이 그를 구합니다. 구조자가 피구조자로 바뀌는 순간이죠. 이 장면이 보여주는 건 명확합니다. 구조하는 사람과 구조받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누구나 양쪽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영화는 결국 토미가 기차에서 처칠의 연설문을 읽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영국 최고의 영웅인 처칠의 목소리를 익명의 병사 토미가 대신 내는 이 장면에서, 놀란이 말하고 싶었던 건 분명합니다. 진짜 영웅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 자리를 지킨 모든 이름 없는 생명들이라는 것. 일반적으로 전쟁 영화는 특정 영웅을 부각하지만, 제가 덩케르크에서 본 건 그 반대였습니다. 생명 그 자체에 대한 숭고함이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QQxnNuQ9p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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