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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트>사냥꾼의 총구가 교차하는 밤: '동림'의 정체와 베드로의 제단(동림 정체, 실제 사건, 반전 구조)

by woozoo100 2026. 2. 25.

영화를 보고 나서도 뭔가 찝찝하게 남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첩보물 같은 장르는 '아, 이 장면이 왜 나왔지?' 싶은 순간들이 많습니다. 저도 <헌트>를 처음 봤을 때 그랬습니다. 2022년 여름, 평일 심야 상영관에서 혼자 앉아 보던 그 영화는 단순한 액션물이 아니었습니다. 1980년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꽤 묵직한 작품이었습니다. 동림이 누구인지 알고 나서 다시 보니 완전히 다른 영화처럼 느껴졌고, 실제 사건들과 대조하면서 보니 이정재 감독의 각본이 얼마나 치밀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영화 헌트 대표 포스터

동림의 정체, 언제 알아챌 수 있나

영화는 관객을 교묘하게 미혹시킵니다. 오프닝부터 박평호와 김정도 두 사람을 동시에 의심하게 만듭니다. 미국 내 한인 교포 사회에서 시작된 대통령 테러 시도, 그걸 막아내는 과정에서 두 차장의 신경전이 팽팽하게 펼쳐집니다. 제가 처음 봤을 때는 김정도가 동림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고문실에서 하루 종일 지내고, 목성사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고, 광주에 있었다는 암시까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클라이맥스가 아닌 4분의 3 지점에서 동림의 정체를 밝힙니다. 일본 출입국 기록에서 발견된 고스트 여권 '최영재'. 박평호가 서베를린 작전 때 썼던 작전 여권이었습니다. 이 타이밍이 절묘합니다. 보통 첩보물은 마지막 반전으로 정체를 밝히는데, <헌트>는 일부러 일찍 알려줍니다. 그리고 나서 진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저는 두 번째 볼 때 일본 시퀀스를 집중해서 봤습니다. 박평호가 망명자 가족보다 자료를 먼저 확보하려는 장면, 김정도가 IBM 컴퓨터로 출입국 기록을 돌린다며 자신 있게 말하는 장면. 모두 복선이었습니다. 동림이 누군지 알고 보면 이 영화는 완전히 다른 결로 읽힙니다.

실제 사건들, 어디까지가 진짜인가

<헌트>의 배경이 되는 1983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특별한 해입니다. 영화 도입부에 나오는 '이 영화는 허구'라는 자막이 무색하게, 실제 있었던 사건들이 빼곡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장영자 사건, 이웅평 귀순 사건, 아웅산 테러까지. 다만 이정재 감독은 핵심 설정을 살짝씩 비틀어 놓았습니다.

김정도가 박평호 집에서 강남 아파트 시세 3천만 원 이야기를 꺼낼 때, 저는 이 대화가 단순한 일상 소재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1982년 장영자 부부가 저지른 6천4백억 원대 금융 사기 사건을 직접 언급하면서, 김정도는 정권의 부패를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당시 은마아파트 한 채가 2천~4천만 원이었으니, 장영자가 받아낸 돈이 얼마나 천문학적이었는지 체감됩니다. 이 장면 직전에 김 교수를 고문하던 장면이 나오는데, 이 대비가 김정도라는 인물의 내면을 은근히 드러냅니다.

이웅평 귀순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1983년 미그기를 몰고 남쪽으로 넘어온 이웅평 대위는 삼양라면 봉지의 '불량품 교환' 문구를 보고 충격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영화는 이 디테일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새로운 난수 암호 체계와 남파 공작원 설정을 추가해 첩보물의 긴장감을 극대화합니다. 팩트와 픽션의 경계를 흐리는 이런 방식이, 제가 <헌트>를 세 번이나 본 이유입니다.

베드로 사냥과 아웅산 테러의 진실

영화 후반부 방콕 시퀀스는 1983년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 랑군에서 발생한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을 재구성한 겁니다. 실제로는 북한 정찰총국 711부대가 대통령 일행을 노린 폭탄 테러를 시도했고, 대통령은 2분 늦게 도착해 가까스로 화를 면했습니다. 21명이 사망하고 47명이 부상당한 비극적 사건이었습니다.

영화는 이 사건의 무대를 방콕으로 옮기고, 동림(박평호)과 김정도가 손을 잡는 설정을 추가합니다. 여기서 두 사람의 목적이 극명하게 갈립니다. 김정도는 무조건 대통령을 죽이려 하고, 동림은 전쟁을 막으려 합니다. 제가 심야 상영관에서 이 장면을 봤을 때, 텅 빈 극장에 울려 퍼진 총성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단순히 '나쁜 놈 vs 좋은 놈' 구도가 아니라, '이념과 국가에 휘둘린 두 인간'의 비극이었습니다.

실제 아웅산 테러 이후 버마는 북한과 국교를 단절했습니다. 건국의 아버지 아웅산의 묘소를 폭파에 이용한 북한의 행위에 분개한 겁니다. 영화는 이런 지정학적 맥락까지 살짝 비추면서, 80년대 한반도가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보여줍니다.

이 영화가 숨긴 것과 드러낸 것

<헌트>는 동림의 정체를 일찍 밝히고, 대신 '왜 그랬는가'를 파고듭니다. 박평호는 북파 공작원 출신으로, 전쟁을 막기 위해 대통령 제거 후 남북 협상이라는 나름의 논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강경파가 집권하면서 목표는 전쟁으로 바뀌고, 동림은 끈 떨어진 연이 됩니다. 제 생각엔 이 지점이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국가도 이념도 개인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입니다.

김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광주의 트라우마를 안고 베드로 사냥에 모든 걸 거는 그의 모습은, 정당한 분노가 어떻게 맹목적 복수로 변질되는지 보여줍니다. 솔직히 저는 김정도가 목성사 최 대표를 추궁하다 죽이는 장면에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정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또 다른 폭력을 저지르는 아이러니였기 때문입니다.

이정재 감독은 첫 장편 연출작에서 이런 복잡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액션과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제가 세 번째 볼 때는 카메오들에 집중했는데, 황정민, 이성민, 주지훈 등이 거의 단역 수준으로 출연한 게 놀라웠습니다. 특히 허성태 배우가 연기한 장철성이 취조실에 들어올 때 공기가 달라지는 느낌, 그건 연출과 연기가 만들어낸 디테일이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어둠 속에서 울린 마지막 두 발의 총성. 그건 관객에게 열어놓은 질문이었습니다. 누가 쏜 건지, 누가 맞은 건지,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 건지.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 이 결말이, 오히려 더 오래 남습니다. 단순한 첩보 액션물로 보기엔 너무 아까운 작품입니다. 실제 사건들을 알고 보면 훨씬 더 재밌고, 동림의 정체를 알고 다시 보면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됩니다. 제 경험상 최소 두 번은 봐야 제맛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5umBtnZ1r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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